가짜 드미트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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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짜 드미트리 1세는 1605년 러시아 차르로 즉위한 인물로, 실제로는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가 아니었다. 수도사 출신인 그는 자신이 드미트리 2세라고 주장하며 폴란드 귀족과 예수회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웠다.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여 보리스 고두노프의 사후 차르로 즉위했으나, 폴란드 편향 정책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불만을 샀다. 결국 11개월 만에 반란으로 살해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가짜 드미트리들이 등장하며 혼란의 시대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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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드미트리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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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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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전 러시아의 차르 |
재위 기간 | 1605년 6월 10일 – 1606년 5월 17일 |
대관식 | 1605년 7월 21일 |
출생일 | 1582년 10월 19일 (주장) |
사망일 | 1606년 5월 17일 |
사망 장소 | 모스크바, 러시아 차르국 |
배우자 | 마리나 므니제치 |
가문 (주장) | 류리크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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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본명 (주장) |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
러시아어 | Лжедмитрий I |
별칭 |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 (주장) |
또 다른 이름 | 유리 (Yurii) |
정치 | |
이전 통치자 | 표도르 2세 |
다음 통치자 | 바실리 4세 |
2. 참칭 이전
그리고리는 수도사였으나 수도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601년경 모스크바로 갔다. 그는 자신이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 2세라고 믿고 있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 소문을 조사하다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카자흐로 달아났다.[10] 이후 폴란드로 망명하여 자신이 드미트리 2세라고 주장했고, 몇몇 폴란드 귀족들이 이에 동조했다.[10] 그는 마리나 므니제치와 사랑에 빠져 폴란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고, 예수회도 가짜 드미트리에게 자금과 교육을 지원했다.[10]
1600년경,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의 요브 대주교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정도로 학식과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보리스 고두노프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오스트로흐에 있는 콘스탄틴 오스트로츠키 공작에게 도망쳤고, 이후 폴란드화된 루테니아인 가문인 비슈네베츠키 가문의 비호를 받았다. 아담 비슈네베츠키와 미하우 비슈네베츠키 공작은 드미트리의 주장을 모스크바의 정치적 반목을 이용할 기회로 보고 그를 지지했다.
드미트리는 폴란드의 선왕 스테판 바토리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화가 난 주인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1591년 우글리치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드미트리가 사실은 보리스 고두노프의 암살 시도를 피해 의사의 도움으로 수도원에 숨어 성장했으며, 의사가 죽은 후 폴란드로 도망쳐 비슈네베츠키 가문에 들어가기 전 잠시 교사로 일했다고 주장했다. 이반 4세를 알고 있던 일부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실제로 어린 황태자와 닮았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승마와 문해력, 러시아어, 폴란드어, 프랑스어에 유창한 귀족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비슈네베츠키 형제, 사무엘 티슈키에비치,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로만 루진스키 등 여러 폴란드 귀족들은 드미트리와 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한 그의 주장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1604년 3월, 드미트리는 크라쿠프에 있는 지그문트 3세 바사의 궁정을 방문하여 잠정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군사적 지원 약속은 받지 못했다. 그는 예수회를 자신의 대의에 끌어들이기 위해 1604년 4월 17일에 공개적으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 사절 클라우디오 랑고니를 설득하여 그의 주장을 지지하도록 했다.
또한, 드미트리는 폴란드 귀족 예르지 음니셰크의 딸 마리나 음니셰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는 마리나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즉위 후 음니셰크 가문에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노브호로드-시베르스키 러시아 마을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2. 1. 수도사 시절과 초기 활동
그리고리는 수도사였으나 수도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601년경 모스크바로 갔다. 그는 자신이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 2세라고 믿고 있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 소문을 조사하다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카자흐로 달아났다.[10] 이후 폴란드로 망명하여 자신이 드미트리 2세라고 주장했고, 몇몇 폴란드 귀족들이 이에 동조했다.[10] 그는 마리나 므니제치와 사랑에 빠져 폴란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고, 예수회도 가짜 드미트리에게 자금과 교육을 지원했다.[10]드미트리는 1600년경 모스크바의 요브 대주교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며 알려졌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드미트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오스트로흐에 있는 콘스탄틴 오스트로츠키 공작에게 도망쳤고, 이후 비슈네베츠키 가문에 들어갔다. 아담 비슈네베츠키와 미하우 비슈네베츠키 공작은 모스크바의 정치적 반목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주장에 관심을 보였다.
드미트리는 스테판 바토리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고, 폭력적인 주인에게 맞았을 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고 한다. 그는 이반 4세의 미망인이 보리스 고두노프의 암살을 예상하고 자신을 의사에게 맡겼으며, 의사가 죽은 후 폴란드로 도망쳐 비슈네베츠키 가문에 들어가기 전 교사로 일했다고 주장했다. 이반 4세를 알던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황태자와 닮았다고 주장했고, 그는 승마와 문해력, 러시아어, 폴란드어, 프랑스어에 유창했다.
비슈네베츠키 형제, 사무엘 티슈키에비치,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로만 루진스키 등은 그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1604년 3월, 드미트리는 지그문트 3세 바사의 궁정을 방문했고, 국왕은 잠정적으로 그를 지지했다. 드미트리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 사절 클라우디오 랑고니를 설득하여 지지를 얻었다.
그는 예지 음니셰크의 딸 마리나 음니셰크와 사랑에 빠졌고, 즉위 후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노브호로드-시베르스키를 음니셰크 가문에 주겠다고 약속했다.
2. 2. 폴란드 망명과 지원 세력 규합
그리고리는 수도원을 떠나 1601년경 모스크바에서 자신이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라고 주장했다.[10]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 소문을 조사하여 그리고리를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카자흐로 도망친 후였다. 이후 그리고리는 폴란드로 망명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일부 폴란드 귀족들이 이에 동조했다.[10]1600년경,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총대주교 이오브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정도로 학식과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보리스 고두노프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오스트로흐에 있는 콘스탄틴 오스트로츠키 공작에게 도망쳤고, 이후 폴란드화된 루테니아인 가문인 비슈네베츠키 가문의 비호를 받았다. 아담 비슈네베츠키와 미하우 비슈네베츠키 공작은 드미트리의 주장을 모스크바의 정치적 반목을 이용할 기회로 보고 그를 지지했다.
드미트리는 폴란드의 선왕 스테판 바토리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화가 난 주인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1591년 우글리치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드미트리가 사실은 보리스 고두노프의 암살 시도를 피해 의사의 도움으로 수도원에 숨어 성장했으며, 의사가 죽은 후 폴란드로 도망쳐 비슈네베츠키 가문에 들어가기 전 잠시 교사로 일했다고 주장했다. 이반 4세를 알고 있던 일부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실제로 어린 황태자와 닮았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승마와 문해력, 러시아어, 폴란드어, 프랑스어에 유창한 귀족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비슈네베츠키 형제, 사무엘 티슈키에비치,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로만 루진스키 등 여러 폴란드 귀족들은 드미트리와 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한 그의 주장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1604년 3월, 드미트리는 크라쿠프에 있는 지그문트 3세 바사의 궁정을 방문하여 잠정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군사적 지원 약속은 받지 못했다. 그는 예수회를 자신의 대의에 끌어들이기 위해 1604년 4월 17일에 공개적으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 사절 클라우디오 랑고니를 설득하여 그의 주장을 지지하도록 했다.
또한, 드미트리는 폴란드 귀족 예르지 음니셰크의 딸 마리나 음니셰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는 마리나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즉위 후 음니셰크 가문에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노브호로드-시베르스키 러시아 마을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3. 러시아 침공
1604년 폴란드에서 지지세력을 모은 가짜 드미트리 1세는 폴란드인과 카자크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보리스 고두노프가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고 드미트리 2세가 실제로 사망했음을 재확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암살 시도를 미리 눈치채고 대역을 내세웠다는 주장을 펼치며 지지 세력을 확장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드미트리가 폴란드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가 도망친 수도승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고 주장했지만, 대중의 지지는 약해졌고, 여러 보야르들이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원을 받은 드미트리는 3,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 남부 코사크들이 합류했다. 그러나 가짜 드미트리 1세의 군대는 잘 훈련된 보리스 고두노프의 군대에 연패했다. 하지만 1605년 4월, 보리스 고두노프가 급사하고 그의 군대를 지휘하던 표도르마저 가짜 드미트리 1세에게 투항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드미트리에게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었고, 러시아 군대는 그의 편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 표도르 2세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했지만, 군인들이 계속 가짜 드미트리 1세 쪽으로 합류하면서 결국 패배했다. 1605년 6월 1일, 모스크바의 보야르들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표도르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스쿠라토바-벨스카야를 감금했다. 1605년 6월 20일, 가짜 드미트리 1세는 8,000명의 코사크와 폴란드인과 함께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7월 21일, 자신이 선택한 그리스인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에 의해 차르로 즉위했다.
3. 1. 폴란드-카자흐 연합군의 침공
1604년, 폴란드에서 지지 세력을 모은 가짜 드미트리 1세는 폴란드인과 카자흐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보리스 고두노프가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고 드미트리 2세가 실제로 사망했음을 재확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암살 시도를 미리 눈치채고 대역을 내세웠다는 주장을 펼치며 지지 세력을 확장했다.그러나 가짜 드미트리 1세의 군대는 잘 훈련된 보리스 고두노프의 군대에 연패했다. 하지만 1605년 4월, 보리스 고두노프가 급사하고 그의 군대를 지휘하던 표도르마저 가짜 드미트리 1세에게 투항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드미트리에게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었고, 러시아 군대는 그의 편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 표도르 2세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했지만, 군인들이 계속 가짜 드미트리 1세 쪽으로 합류하면서 결국 패배했다. 1605년 6월 1일, 모스크바의 보야르들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표도르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스쿠라토바-벨스카야를 감금했다. 1605년 6월 20일, 가짜 드미트리 1세는 8,000명의 코사크와 폴란드인과 함께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7월 21일, 자신이 선택한 그리스인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에 의해 차르로 즉위했다.
3. 2. 보리스 고두노프의 급사와 전세 역전
1604년 가짜 드미트리 1세는 폴란드인과 카자크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리고리의 숙부를 데려와 가짜임을 밝히려 했으나, 가짜 드미트리 1세 측은 드미트리 2세의 대역을 주장하며 반박했다. 이로 인해 보리스에 반대하고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났다.초반에는 잘 훈련된 보리스의 진압군이 우세했으나, 1605년 4월 보리스 고두노프가 급사하고 그의 군대를 지휘하던 표도르마저 가짜 드미트리 1세에게 투항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보리스의 아들 표도르 2세가 차르에 즉위했으나, 군인들이 계속 가짜 드미트리 1세에게 투항하여 패배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드미트리가 폴란드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도망친 수도승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고 주장했지만, 대중의 지지는 약해졌고, 여러 보야르들이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원을 받은 드미트리는 3,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 남부 코사크들이 합류했다. 두 차례의 교전 후, 보리스 고두노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드미트리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하고, 승리한 러시아 군대는 드미트리 편으로 전향했다.
1605년 6월 20일,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6월 1일, 모스크바의 보야르들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표도르 2세와 그의 어머니를 감금했고, 6월 20일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에 개선, 7월 21일 이그나티우스에 의해 차르로 즉위했다.
3. 3. 모스크바 입성과 즉위
1604년 폴란드에서 지지세력을 모은 가짜 드미트리 1세는 폴란드인과 카자크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드미트리가 폴란드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가 도망친 수도승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유리 오트레피예프로 출생, 그리고리는 수도원에서 주어진 이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리스 고두노프가 이 소문을 퍼뜨리려고 노력할수록 드미트리 지지자가 늘어났다. 여러 러시아 대귀족들도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차르 보리스에게 세금을 납부하지 않을 "정당한" 이유를 만들었다.가짜 드미트리 1세 측에서는 드미트리 2세(드미트리)의 시체에 대해, 사실은 암살 기도를 미리 눈치채고 자신과 나이가 유사한 소년에게 드미트리 2세인 것처럼 하라고 대역을 시켜놨다고 하면서 그 시체는 그때 살해당한 자신의 대역이라고 주장했다. 보리스에 반대하고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지지하는 지역은 점점 늘어났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완전한 지원을 얻은 드미트리는 다양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병들로 구성된 약 3,500명의 병력으로 소규모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1605년 3월, 이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다. 남부의 코사크를 비롯한 고두노프의 적대자들이 드미트리의 모스크바 진군에 참여했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 1세의 부대는 아무렇게나 모인 잡다한 세력을 규합한 것에 지나지 않아, 잘 훈련된 보리스의 진압군에 연전연패를 당하게 된다. 드미트리군은 전의가 낮은 모스크바 국가군과 두 번 교전하여, 한 번은 쿠르스크를 비롯한 4개 도시를 함락시켜 승리했지만, 두 번째는 대패 직전에 몰렸다.
1605년 4월, 보리스가 급사하고, 그의 군대를 지휘하던 표도르마저 가짜 드미트리 1세에게 투항하여 전세가 일거에 역전된다. 보리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드미트리를 거부할 명분을 잃은 러시아 측은, 얼렁뚱땅 드미트리 지지로 돌아서는 자들이 잇따랐다.
보리스의 아들인 표도르 2세가 새로운 차르에 즉위하지만, 차르의 군대에 소속된 군인들이 계속 가짜 드미트리 1세 쪽으로 붙자 결국 가짜 드미트리 1세에게 패배한다. 1605년 6월 20일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드디어 모스크바에 입성한다. 6월 1일, 모스크바의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즉위한 차르 표도르 2세와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 스쿠라토바-벨스카야, 보리스 고두노프의 미망인을 감금했다. 6월 20일, 참칭자는 수도 모스크바에 개선 입성했고, 자신이 새로 선택한 그리스인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의 손으로 6월 21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4. 차르 즉위
러시아 차르국의 백성들은 가짜 드미트리 1세를 드미트리 2세의 재림으로 받아들였다.[4] 바실리 슈이스키 역시 진짜 드미트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증언했으며,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르타 역시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다.[4]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보리스 고두노프 시절 탄압을 받은 귀족들을 원상복귀시키고, 보리스의 친구나 친인척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이때 자리를 차지한 사람 중에 미하일 1세의 아버지 필라레트도 있었다. 그는 로스토프의 수좌 대주교에 임명된다.[4]
하지만 초창기의 열광이 지나고 나자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러시아 차르국 백성들을 실망시켰다. 그는 러시아의 전통적 적국인 폴란드 여성을 왕비로 삼았으며, 기존 왕가의 법도를 존중하지 않았다. 또한 가짜 드미트리 1세를 따라 온 폴란드인들이 자주 소동을 일으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새로운 차르는 차르 이반의 무덤과 그의 미망인 마리아 나가야의 수녀원을 방문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다. 마리아 나가야는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의 이야기를 "확인"했다.[3] 고두노프 가문은 차르 표도르와 그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살해되었지만, 차례브나 크세니아는 예외였다. 드미트리는 그녀를 강간하고 5개월 동안 첩으로 두었다. 차르 보리스가 추방했던 슈이스키 가문, 골리친 가문, 로마노프 가문 등 많은 귀족 가문이 사면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다.[3] 미래의 제국 왕조의 조상인 표도르 로마노프는 곧 로스토프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고, 새로운 차르를 인정하지 않은 늙은 총대주교 요브는 추방되었다.[3]
드미트리는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농노들이 다른 영주에게 충성을 바꿀 수 있는 날인 성 게오르기우스 축일을 부활시켜 농민들의 조건을 완화시켰다.[3] 러시아 궁정에서 그가 가장 총애했던 18세의 이반 흐보로스티닌 공은 역사가들이 러시아 최초의 서구화주의자 중 한 명으로 여긴다.[3]
외교 정책에서 드미트리는 후원자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교황령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화기의 대량 생산을 명령했다. 그는 서신에서 스스로를 "러시아 황제"라고 칭했는데, 이는 차르 표트르 1세가 그 칭호를 사용하기 한 세기 전이었지만,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드미트리의 왕실 묘사는 턱수염을 깎고,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특이한 모습이었다.[3]
1606년 5월 8일,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에서 마리나 므니셰크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가톨릭 신자였다. 러시아 차르가 다른 종교의 여인과 결혼할 때, 보통 그녀는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이 관례였다. 드미트리가 러시아 정교회와 성좌를 재결합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와 교황 바오로 5세의 지지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에 따르면 차리나 마리나는 정교 신앙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이것은 러시아 정교회, 보야르, 그리고 일반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었다.[4]
보야르의 수장이었던 불만을 품은 바실리 슈이스키 공은 차르를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가 로마 가톨릭교, 루터교, 소도미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인기를 얻었고, 특히 드미트리가 러시아 관습을 무시하는 외국인들로 둘러싸이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었는데, 당시 보수적인 러시아 사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러시아 연대기 작가 아브라미 팔리친에 따르면, 드미트리는 러시아 교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자신의 가톨릭 및 개신교 군인들이 정교회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많은 모스크바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4]
슈이스키의 지지자들은 차르 드미트리가 곧 자신의 폴란드 측근들에게 도시의 문을 잠그고 모스크바 사람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한 명령이 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팔리친의 연대기는 그것들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고했다.[5]
4. 1. 권력 장악과 개혁 시도
러시아 차르국의 백성들은 가짜 드미트리 1세를 드미트리 2세의 재림으로 받아들였다. 바실리 슈이스키 역시 진짜 드미트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증언했으며,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르타 역시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다.가짜 드미트리 1세는 즉위 후, 차르 이반의 무덤과 그의 미망인 마리아 나가야의 수녀원을 방문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마리아 나가야는 그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보리스 고두노프 시절 탄압을 받은 슈이스키 가문, 골리친 가문, 로마노프 가문 등 많은 귀족 가문이 사면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미하일 1세의 아버지 필라레트는 로스토프의 수좌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고두노프 가문은 차르 표도르와 그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살해되었지만, 차례브나 크세니아는 예외였다. 드미트리는 그녀를 강간하고 5개월 동안 첩으로 두었다.
드미트리는 농노들이 다른 영주에게 충성을 바꿀 수 있는 날인 성 게오르기우스 축일을 부활시켜 농민들의 조건을 완화시키는 등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3] 외교 정책에서는 후원자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교황령과의 동맹을 모색했고,[3]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화기의 대량 생산을 명령했다.[3] 그는 서신에서 스스로를 "러시아 황제"라고 칭했는데, 이는 표트르 1세가 그 칭호를 사용하기 한 세기 전이었다.[3]
1606년 5월 8일, 드미트리는 마리나 므니셰크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가톨릭 신자였다.[4] 러시아 차르가 다른 종교의 여인과 결혼할 때, 보통 그녀는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마리나는 정교 신앙으로 개종하지 않았다.[4] 이는 러시아 정교회, 보야르, 그리고 일반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었다.[4]
보야르의 수장이었던 불만을 품은 바실리 슈이스키 공은 차르를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가 로마 가톨릭교, 루터교, 소도미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4] 특히 드미트리가 러시아 관습을 무시하는 외국인들로 둘러싸이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4] 러시아 연대기 작가 아브라미 팔리친에 따르면, 드미트리는 러시아 교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자신의 가톨릭 및 개신교 군인들이 정교회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많은 모스크바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4]
4. 2. 폴란드 편향 정책과 반발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즉위 초반에는 보야르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폴란드 편향 정책으로 인해 곧 반발에 직면했다. 그는 보리스 고두노프 시절 탄압받은 귀족들을 복권시키고, 미하일 1세의 아버지 필라레트를 로스토프 수좌 대주교에 임명하는 등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차르 이반의 무덤을 방문하고, 그의 미망인 마리아 나가야에게 아들로 인정받기도 했다. 고두노프 가문은 몰살당했지만, 딸 크세니아는 드미트리에게 강간당하고 5개월 동안 첩으로 지냈다.그러나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러시아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하고 폴란드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 러시아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그는 러시아 차르국의 전통적인 적국인 폴란드의 여성 마리나 므니셰크와 결혼하고, 그녀가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았음에도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과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를 따라온 폴란드인들이 자주 소동을 일으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바실리 슈이스키를 비롯한 보야르들은 가짜 드미트리 1세가 로마 가톨릭교, 루터교, 소도미를 퍼뜨린다고 비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 연대기 작가 아브라미 팔리친에 따르면, 가짜 드미트리 1세는 가톨릭 및 개신교 군인들이 정교회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용하여 많은 모스크바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4]
결국, 1606년 5월 17일, 반란군은 크렘린을 급습하여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살해했다. 그의 시신은 붉은 광장에서 공개 처형된 후 소각되었고, 남은 유해는 대포에 넣어 폴란드를 향해 발사되었다.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죽은 후, 마리야 나가야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5. 몰락과 최후
가짜 드미트리 1세에 대한 열광이 지나가고 그에 대한 실망감이 계속되자, 가짜 드미트리 1세의 반대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지지했던 바실리 4세는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바실리 4세는 곧 체포되었지만,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자신이 진짜로 이반 4세의 아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헛소문'으로 취급하고 풀어준다.
사실상 혼인 상태에 있었던 마리나와의 결혼식은 이러한 반대자들의 움직임을 더욱 자극했다. 1605년 겨울 둘은 정식으로 약혼하고, 1606년 5월 8일에 결혼식을 치른다. 바실리는 지지자를 규합하여 5월 26일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폴란드인으로부터 러시아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사기꾼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가짜 드미트리가 진짜라고 선언하였던 마르타 역시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였다.
한밤중의 기습에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당황하여 달아났지만, 이때 가짜 드미트리 1세는 고층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으므로 두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때 몰려든 근위병들은 그가 가짜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살해했다.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살해당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욕설을 퍼부으며 죽어갔다. 이후 마리나가 황후에서 쫓겨남은 물론이고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세운 관료들도 쫓겨났으며, 표도르 2세와 폴란드 인들도 살해당한다.[6]
1606년 5월 17일 아침, 드미트리가 마리나와 결혼한 지 10일 만에 수많은 귀족과 평민들이 크렘린 궁전을 습격했다. 드미트리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려 했지만, 추락하면서 다리가 부러졌다. 그는 목욕탕으로 도망쳐 그 안에 숨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발각되었고, 군중에게 성공적으로 호소할까 두려워한 귀족들에게 끌려 나와 살해당했다.[6] 그의 시신은 조각조각 찢겨 불태워졌고, 재는 대포로 폴란드로 쏘아 보냈다.[7] 팔리친에 따르면, 드미트리의 죽음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학살을 촉발시켰다. 그는 연대기에 "모스크바 거리에서 엄청난 양의 이교도 피가 흘렀다"고 자랑했다.[8]
드미트리의 통치는 불과 11개월 만에 끝나고 슈이스키 공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후 가짜 드미트리 2세와 가짜 드미트리 3세 두 명의 사칭자가 더 나타났는데, 그중 첫 번째는 차리나 마리나에 의해 공개적으로 죽은 남편으로 "인정"받았다.
5. 1. 반대 세력의 등장과 음모
가짜 드미트리 1세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식고 실망감이 커지자, 반대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6]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지지했던 바실리 4세는 그가 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렸으나,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자신을 이반 4세의 아들이라 믿었기에 바실리 4세를 풀어주었다.1606년 5월 8일,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마리나와 결혼식을 올렸다.[6] 이는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더욱 자극했는데, 마리나가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고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교회, 귀족, 민중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6]
바실리 4세는 지지자들을 모아 5월 26일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폴란드로부터 러시아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진짜라고 선언했던 마르타 역시 입장을 번복했다.
5월 17일 아침, 반란군은 크렘린 궁전을 급습했다.[6]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려 했으나 다리가 부러졌고, 결국 발각되어 살해당했다.[6] 그의 시신은 불태워져 재는 대포로 폴란드에 쏘아졌다.[7]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죽은 뒤, 황후 마리나는 쫓겨났고,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임명한 관료들과 표도르 2세를 비롯한 폴란드 인들도 살해당했다.
5. 2. 마리나와의 결혼과 반란
가짜 드미트리 1세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사그라들고 실망감이 커지면서,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지지했던 바실리 4세는 그가 진짜 드미트리가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렸으나,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자신을 이반 4세의 아들이라 믿었기에 바실리 4세를 풀어주었다.[6]1605년 겨울,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마리나와 약혼하고, 1606년 5월 8일에 결혼식을 올렸다.[6] 마리나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는데, 이는 러시아 정교회의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가짜 드미트리 1세에 대한 반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바실리 4세는 지지자들을 모아 5월 26일 모스크바를 공격, 폴란드로부터 러시아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이전에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진짜라고 증언했던 마르타 역시 입장을 번복했다.
5월 17일 아침, 귀족들과 평민들이 크렘린 궁전을 습격했다.[6]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려다 다리가 부러졌고, 목욕탕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6] 그의 시신은 불태워져 재는 대포로 폴란드를 향해 쏘아졌다.[7] 팔리친은 연대기에 "모스크바 거리에서 엄청난 양의 이교도 피가 흘렀다"고 기록했다.[8]
가짜 드미트리 1세의 통치는 11개월 만에 끝났고, 슈이스키 공이 그 뒤를 이었다. 이후 가짜 드미트리 2세와 가짜 드미트리 3세 등 두 명의 가짜 드미트리가 더 나타났다.
5. 3. 최후와 처참한 죽음
가짜 드미트리 1세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들고 실망감이 커지자, 반대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지지했던 바실리 4세는 그가 진짜 행세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으나,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자신을 이반 4세의 아들이라 믿었기에 바실리 4세를 풀어준다.[6]1605년 겨울 마리나와 약혼하고, 1606년 5월 8일 결혼식을 올린 것은 반대자들의 움직임을 더욱 자극했다.[6] 바실리는 지지자들을 모아 5월 26일 모스크바로 쳐들어갔고, 폴란드로부터 러시아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사기꾼이라고 발표했다.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진짜라고 선언했던 마르타 역시 입장을 번복했다.[6]
5월 17일 아침, 귀족과 평민들이 크렘린 궁전을 습격했다.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려 했지만, 다리가 부러졌다.[6] 목욕탕으로 도망쳐 숨으려 했으나 곧 발각되었고, 군중에게 호소할까 두려워한 귀족들에게 끌려나와 살해당했다.[6] 그의 시신은 찢겨 불태워졌고, 재는 대포로 폴란드를 향해 쏘아졌다.[7] 팔리친은 연대기에 "모스크바 거리에서 엄청난 양의 이교도 피가 흘렀다"고 기록했다.[8]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살해당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마리나는 황후에서 쫓겨났고,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세운 관료들과 표도르, 폴란드 인들도 살해당했다. 그의 통치는 11개월 만에 끝났고, 슈이스키 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후 가짜 드미트리 2세와 가짜 드미트리 3세가 나타났으며, 첫 번째는 마리나에게 죽은 남편으로 "인정"받았다.
6. 사후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사후에 바실리 4세가 차르가 되었다. 그는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사기꾼으로 낙인찍고, 그의 시체를 불태운 후 대포에 넣어 폴란드 방향으로 쏘았다. 또한 진짜 드미트리 2세의 시체를 모스크바로 가져와 시성하였다.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드미트리 2세임을 주장하는 자들이 계속 등장하였다.
6. 1. 바실리 4세의 즉위와 드미트리 사칭자들의 등장
바실리 4세는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사기꾼으로 낙인찍고, 그의 시체를 불태운 후 대포에 넣어 폴란드 방향으로 쏘았다. 또한 진짜 드미트리 2세의 시체를 모스크바로 가져와 시성하였다.가짜 드미트리 1세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드미트리 2세임을 주장하는 자들이 계속 등장하였다.
7. 평가
7. 1. 역사적 의의와 교훈
7. 2.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가짜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무운시 드라마 ''보리스 고두노프''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이다. 푸시킨은 가짜 드미트리를 인간적으로 묘사하려 했으나, 이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반감을 사 출판이나 공연이 금지되었다.[9] 푸시킨은 앙리 4세와 드미트리의 유사성을 언급하며, 둘 다 용감하고 관대하며 허풍선이이고 종교에 무관심하며, 정치적인 이유로 신앙을 버리고 쾌락과 전쟁을 좋아하며 비현실적인 계획에 헌신한다고 보았다.[9] 하지만 앙리 4세와 달리 드미트리는 크세냐를 죽였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푸시킨은 이를 믿지 않으려 했다.[9] 푸시킨은 드미트리와 바실리의 통치, 그리고 그 후의 혼란기에 관한 추가 희곡을 쓸 계획이었으나, 결투로 인해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실현하지 못했다.[9]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는 푸시킨의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만들었으나, 가짜 드미트리, 폴란드인, 로마 가톨릭교회를 악마화했다. 가짜 드미트리가 마리나 므니셰크와 약혼하는 것은 예수회의 조장으로 묘사되며, 마리나가 사칭자를 유혹하는 것을 주저하자 예수회는 그녀를 지옥불로 위협한다. 반면 푸시킨은 마리나가 병적인 야망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보았다. 오페라의 대단원에서 사칭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성스러운 바보 니콜라이가 슬퍼하며 "울어라, 울어라 정교회여"라고 외치며, "밤보다 더 어두운 어둠"으로 이어지는 "적이 올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가짜 드미트리의 이야기는 실러(''데메트리우스''에서), 수마로코프, 호먀코프, 욘시에르(오페라 ''드미트리'')와 드보르자크(오페라 ''드미트리'')에 의해서도 다루어졌다. 릴케는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에서 가짜 드미트리의 몰락을 이야기한다. 해롤드 램은 "늑대 대장"에서 가짜 드미트리의 죽음을 허구화했는데, 여기서 사칭자는 속임수를 통해 암살에서 살아남아 배신했던 코사크의 추격을 받으며 동쪽으로 도망친다.
참조
[1]
문서
[2]
서적
Russia's First Civil War: The Time of Troubles and the Founding of the Romanov Dynasty
https://books.googl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10-10-16
[3]
서적
The West in Russia and China, Religious and Secular Thought in Modern Times, Vol1: Russia, 1472-1917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Medieval Russia's Epics, Chronicles, and Tales
Meridian Books
[5]
문서
[6]
문서
"Massa's Account of Events Surrounding the Death of the False Dmitrii in 1606."
Harcourt College
[7]
서적
Russian Rebels; 1600-1800
Schocken Books
1972
[8]
문서
[9]
문서
The Critical Prose of Alexander Pushkin
University of Indiana Press
[10]
문서
폴란드-러시아 전쟁 (1605년-1618년) 폴란드 침공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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